원주협동사회경제네크워크

원주협동운동역사

History of Wonju C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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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 1960 ~ 70

  • 1980 ~

  • 2000 ~

1960~70년대

‘거룩한 땅’의 시대

원주에서의 협동운동은 1965년 천주교 원주교구가 설정된 이듬해인 1966년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크게 영향받은 지학순 주교가 천주교 원주교구에 부임하면서,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며 장일순 선생과 손잡고 다양한 신용협동조합을 조직해나간 것이 그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72년에는 남한강 지역의 3개도 13개 시·군, 87개 읍·면에 밀어닥친 수해 복구 사업을 독일의 천주교 구호단체인 ‘미제레올’과 ‘까리따스’의 지원으로 농민, 노동자, 어민, 영세 시민들이 협동적 공동체 건설과 직접 민주주의를 체득하는 광범위한 자활운동을 전개합니다.

지학순 주교가 보호하고 장일순 선생이 주도한 ‘원주캠프’는 한편에서는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신용·구매·공제·생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동운동을 조직해나갔습니다.

1980년대

‘엑서더스와 전국화’의 시대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공업중심, 도시중심의 정책이 정점을 치달을 때 농촌이 피폐의 길을 걷자 장일순 선생과 지역 협동조합 운동가들은 새로운 협동조합 운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협동운동의 전환에는 지난 15년간 펼쳐왔던 원주에서의 밑바닥 경험과 장일순 선생의 깊은 사유가 깔렸었습니다. 인간을 생산자이거나 소비자인 주류적 인간으로 보지 않고, 생명을 모신 전일적 인간으로 바라봤습니다(협동운동의 주체). 따라서 인간과 인간의 협동을 동질인 이들 간의 묶음(bonding)이 아니라 이질인 이들 간의 엮음(bridging)에서 찾았습니다(협동운동의 방식). 이런 엮음의 관계를 통해 우리만의 생존을 넘어 다른 이들과의 공생을 모색했습니다(협동운동의 목적). 생명에 대한 원주캠프의 오랜 사유와 실천이 이때부터 ‘생명운동’으로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80년대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은 이전보다 더 냉혹하게 원주를 탄압했습니다.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의 급변은 원주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던 탄광촌과 농촌을 쇠퇴시켰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응해 원주캠프의 주요 분들은 그 활동의 근거지를 서울로 옮겨 전국을 대상으로 새로운 생명협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금의 한 살림이 이렇게 태동했습니다.

2000년대

‘다시 지역’의 시대

원주캠프의 주요 리더들이 원주로부터 엑서더스해 그 활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는 동안 원주에서의 협동운동도 많은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 실체로서 지역 주민에게 의료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원주의료생협’이 원주밝음신협, 원주한살림, 원주생협 등의 협동조합 간 협동으로 발족했고 2003년 6월 5일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협동운동의 토대 형성과 상호 간 협력을 위한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라는 협의체가 태동했습니다. 이후 지역 주민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는 협동조직을 태동시키는 데로 이어졌습니다.

2007년 사회적기업 육성법 제정으로 원주지역에 사회적기업을 포함해 다양한 사회적경제 주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을 겪으며 더욱 강한 결속력을 가진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로 전환했습니다. 2012년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2013년에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를 창립하고 협업체계 구축을 통한 지역사회의 사회적경제 생태계 조성과 공동체 실현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